길에서만나다

[책]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이존예 2008. 3. 28. 22:06



# 근로 시간만큼 긴 것이 또한 영업시간.
독일에서는 오후 7시만 되면 웬만한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
노동자들에게 가족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라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밤늦게까지 영업을 한다.
아예 24시간 영업을 하는 김밥집도 있다.
이 정도면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 밖에.




#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 시선은 권력이다.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은 처지가 다르다.




# 미래의 이익(interest)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그런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 부른다.



# 같은 달력을 사용한다고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해오딘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 어느 곳에서나 사회적 엘리트는 자신들과 하층민 사이의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려 하고, 대중은 필사적으로 그 차이를 지우려 하는 법이다.



# 아이가 사회로 나가는 것을 한국인은 '출세'로 이해한다.
가정에서 아이를 사회로 내보낼 때 중시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서로 편하게 더불어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남들 위에 서느냐'하는 것. (...) 시험문제 하나라도 틀리면 세상이 무너질 듯 난리를 쳐도 제 아이가 공공의 규칙을 깨는 데서는 아무 문제도 못 느낀다.



# 한국에서 어른들은 아이만큼 유치하고, 아이들은 어른들만큼 노회하다.




#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늘 들었던 말이 바로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소리.
학교에서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마저 남의 눈에 맞춰지고, 사람들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 창의성은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곳에서 한 번의 실패는 곧바로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냥 사느냐, 더 잘 사느냐'의 문제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새 영역을 개척하기보다는, 이미 안전한 것으로 입증된 낡은 습관을 고집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회라고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를 호소할 때조차도 이런 사회는 사회 생물학의 레토릭을 구사해야 한다.

"변해야 산다."




#  원초적 폭력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수'에 속해야 한다.
무슨 일에서든 유난히 '쏠림' 현상이 심한 것은 실은 고립되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다.
다수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소수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회에서 혁신과 창안을 위한 용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것은 낡은 습관에 따라 행해진다.
이렇게 공포는 습관을 낳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루어 한국인의 보수성을 구현한다.




# 명품의 소비자는 '상품'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 얼마 전만 해도 해외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의 관광객들은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렵게 찾아와서는 사진만 찍고는 서둘러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being)는 체험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남기는, '언젠가 거기에 있었다(having been)'는 사실의 증거.



# 철학자 니체는 존재의 상투성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너 자신을 발명하라."라고 외쳤다. (...) 이 어법이 풍기는 낙관적 냄새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유미주의가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니체의 격률은 아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엘리트주의 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아나운서들의 '프리랜서' 선언은 얼마나 다른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더 높은 가능성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을 의미하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아직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쫓겨나 노동사무소를 전전하거나, 퇴직금으로 창업을 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늘 새로 발명하도록, 새로 디자인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



어제는 진보 학생 모임에서 주최하는 진중권의 강연회에 갔었다. 200개의 좌석은 금세 가득 찼고, 그의 강연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계단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그는 10분 지각했고, 학생 대표의 간단한 프로필 언급과 동시에 강연을 시작했다. 주제는 '이명박 시대, 한국 사회 어디로 가나' 제목만 들어도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는 들여다 보이는 강연이었다. 사실 강연의 내용은 이미 그가 글로 내뿜은 얘기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 자리에 1시간 반을 앉아있었던 것일까.


그의 입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웃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어쩌면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힐난하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그의 강연을 웃으며 듣고 있던 나는... 정작 그의 대표 저서인 『미학 오디세이』조차 읽은 적 없는 사람이었던 것을. 온라인에서 읽은 그의 독설 몇 개만 읽고 그의 생각을 지지하고, 나는 그와 한 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는 2MB를 뽑은 사람들을 향해 "멍청이"라고 말할 자격이 되는 사람일까.
어쩌면 내가 2MB대신 문국현을 뽑은 것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전망을 문국현에게서 찾은 것이 아니라, 다만 천박해지지 않으려는 발악은 아니었던건지. 일종의 새로운 권력이자, 엘리트주의일지도 모르겠다.
난 너희와 달라, 난 생각있는 사람이야... 엘리트주의 교육에는 그렇게 반대하면서 생각자체가 엘리트주의라니, 아이러니하다.


신문은 읽는데, 정몽준의 전재산이 3조 6천억원이더라.
그가 포함되면 한나라당 총선 후보자의 재산 평균은 177억이지만, 그를 제외하면 30억으로 급하락(?)한다.
그 정도의 돈이 있는데, 그는 왜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을까... 국회의원의 월급따위 그에게는 돈같지도 않을텐데.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욱 무서운 직업인 거 같다.
도대체 어떤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길래. 저만큼이나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아, 내 수중의 배춧잎 한 장은 돈의 가치조차 상실해버린 느낌이다.